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종파사건 (문단 편집) ==== 주요 정치 파벌 ==== [include(틀:과거 조선로동당의 파벌)] * [[만주파(북한)|'''만주파''']] [[김일성]], [[김책]], [[김광협]], [[최용건]], [[강건(북한)|강건]] 등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 무장 [[빨치산]] 활동을 했던 그룹이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의거해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에 중국인과 조선인들의 연합 항일무장부대인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긴 하지만, 동북항일연군 자체가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만주 지방에 군웅할거하던 수많은 항일 무장세력의 연합체 같은 것이어서, 일방적인 지휘계통은 아니었다. 이들은 국내에 조국광복회라는 통일전선체를 만들었다고도 하지만, 이는 상당부분 신빙성과 규모를 의심받고 있다. 이들은 만주지역의 조선인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보천보 전투]], 간삼봉 전투를 주도했고, 1930년대 말 [[일본군]]의 빨치산 토벌이 격화되자 1940년을 기점으로 차츰 소련령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로 피신하였다. 김일성이 1940년에 가장 먼저 넘어갔고, 김책이 1943년도에 가장 늦게 월경하였다. 이후 [[소련군]] 장교 계급을 받고 극동군88저격여단에 편입돼서 군사 훈련을 받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자 1945년 10월 소련군 장교 신분으로 북한에 들어왔다. 이후 [[소군정]]의 후원 아래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군]]의 핵심을 차지했고 김일성은 내각 [[수상]]으로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활동한 적이 없으며 항상 중국인들과 함께 활동했다.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할 때도, 이후 연해주로 피신해서 소련군의 극동군88저격여단 소속일 때도 언제나 조선인과 중국인이 섞여있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극동군88저격여단 소속의 중국인들은 중국공산당으로 복귀해서 2차 [[국공내전]]에 뛰어들고,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따라서 북한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조중군사동맹은 이런 역사적 뿌리가 있는 [[혈맹]] 관계이다. * '''[[갑산파]]''' [[박금철]], [[리효순]], [[리송운]], 김왈룡 등 1930~40년대 한반도 북부 지방에서 활동했던 그룹이다. 소련 유학파 2세대인 [[박용국(북한)|박용국]], 허석선, [[김도만]], [[고혁(북한)|고혁]] 등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이 갑산파와 함께 숙청된 것은 사실이지만 갑산파의 일원인지는 불분명하다. [[김익선]]을 갑산파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는데 확실히 아니다. 이들 상당수가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이라 '갑산파'라고 부른다. (갑산군은 북한 행정구역상 [[량강도]] [[갑산군]]. [[이북 5도]] 기준으로는 함경남도 관할) 이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만주파와 연계해서 활동했고 해방 후에도 [[만주파(북한)|만주파]]와 함께 했기 때문에 크게는 만주파의 일부로 본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일제강점기 동안에 김일성이 지도했다는 조국광복회의 산하조직인 갑산공작위원회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다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현대사 연구자들은 조국광복회의 실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당시 빨치산들이 선전용으로 부풀린 페이퍼조직이란 게 정설인데 사실 이런 행태는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역사에서 흔하다. 빨치산이 만주파의 직계라면 이쪽은 방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 갑산파 그룹은 8월 종파사건을 비롯해서 계속되는 권력 투쟁에서 언제나 김일성을 지지했기 때문에 아래 서술되는 다른 세력들이 모두 숙청된 이후에도 한동안 권력 핵심부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이견을 보이다가 [[갑산파 숙청 사건|결국 숙청되고 만다.]] 이들이 사라지면서 북한 정권에는 김일성의 친인척과 빨치산 시절 직계 부하들만 남게 된다. 견제세력이 사라진 완벽한 김일성 1인 독재가 완성된 것이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3/12/17/0601080100AKR20131217017700071.HTML|중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감]] * '''[[연안파]]'''(A.K.A. 중공파) [[김두봉]], [[김무정]], [[허정숙]], [[최창익]], [[윤공흠]], [[박일우]], 서휘, [[방호산]]처럼 항일 전쟁과 [[국공내전]]에 참여하면서 중국 본토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그룹. 이들의 상당수는 1930년대 말부터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등으로 활동하면서 [[중국공산당]]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혹은 김무정처럼 아예 중국 공산당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 때문에 국공내전기 [[중국공산당]]의 수도였던 [[옌안시|연안]]의 이름을 따서 연안파라고 부른다. [[6.25 전쟁]] 이후 북한의 사회주의건설 노선을 둘러싸고 만주파와 대립하다가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숙청당했다. 이들은 [[조선의용군]]이라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파나 소련파와는 달리 [[김무정]], [[방호산]] 등이 북한군에서 주요 직책을 맡기도 하는 등 군부에서도 세력이 있었고, 김일성보다 더 큰 규모로 무장독립운동을 했다는 명분까지 갖고 있기는 했으나 특정한 리더가 없었으며 단결력이 약했다. 또한 독립운동을 했던 장소가 국내와는 너무 멀어서 독립운동 업적에 비해서는 대중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낮았다. * '''소련파'''[anchor(소련파)] [[박창옥]], [[허가이]], [[남일]], [[방학세]], [[정상진]] 등 소련 출신 그룹. 주로 중앙아시아와 연해주의 [[고려인]] 2, 3세들로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현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소련 공산당]]원을 찾다보니 북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만주파와 손을 잡고 남로당파를 숙청하는 일에 관여했다. 1956년 2월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한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를 계기로 하여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에 도전했으나,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12월 전원회의를 거치면서 숙청되었다. 정상진 등 소련 국적자들은 숙청되자 소련으로 귀국해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 '''[[남조선로동당|남로당]]파'''(A.K.A. 국내파)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여 [[김삼룡]], [[이주하(1905)|이주하]], [[리강국]], [[리승엽]], [[허헌]], [[이현상]] 등 [[일제강점기]] 시절 국내에서 항일운동 및 공산당 활동을 했던 그룹. 이들은 일제 패망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정예당원 10만, 방계조직 100만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면서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를 주도하였다. 박헌영이 주도하던 이 그룹은 처음에는 우익 및 미군정과 협력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전면적인 찬탁 노선 채택[* 한반도의 현대사를 바꾼 분기점으로 평가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동아일보의 고의적인 오보]]가 큰 영향을 미쳤다.]으로 대중적인 입지가 좁아지게 되고 미군정이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일으키며 좌익 탄압을 본격화하자 '신전술'이라는 강경 노선을 채택하는데 이 결과로 [[대구 10.1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조선공산당이 불법화되자 박헌영, 리승엽 등 지도부와 정예당원 수천여 명이 집단 월북하였다. 8.15 해방 직후 초기에 박헌영이 주도한 좌익계들은 우익과 통일전선을 만든다는 게 기본 방침이었고, 강경우익의 대명사 이승만조차도 귀국 직후에는 조선공산당과 손을 잡으려고 했었지만 결국 비극으로 귀결되었다. 이승만은 공식 기자회견에서 "나의 경제정책은 공산주의와 비슷한게 많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행보를 김구가 공개비난하면서 둘 사이가 벌어진다. 이후 다른 좌익계 정당인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통합하여 [[남조선로동당]], 약칭 남로당을 만들었다. 이후 1949년 6월 북로당과 합당하여 현재의 [[조선로동당]]이 된다. 남한내 단독정부 수립이 거의 확실시 되었을 무렵부터 남로당은 무장반란을 일으키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남로당파는 [[연안파]]의 [[김무정|무정]]이 숙청된 이후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숙청되어 북한에서 가장 먼저 실각한 파벌이다. 이렇게 여러 정파가 소련군정의 압력으로 합당해서 출범한 정당이 조선로동당이었다. 이들은 [[6.25 전쟁]]까지만 해도 서로를 견제하고 있긴 했으나 '''전시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별개의 정당이었던것이 갑자기 하나의 정당이 되었기 때문에 남한의 여러 정당들이 그렇듯(...) 당대 조선로동당 내에서도 계파갈등이나 김일성에 대한 비토는 많이 있었다. 일례로 [[김무정]]은 '중위나 대위 달고 들어온 놈들이 무슨 장군이냐!'는 말을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전쟁 전에는 김일성의 견제로 인해 스스로의 명성만큼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고 심지어는 6.25 전쟁 중에 낙동강 공략 실패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숙청]]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김일성은 스탈린의 점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박헌영을 제외하고 다른 세력들에게 모두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박헌영조차도 6.25 전쟁 개전을 앞두고 남침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김일성을 수령으로 부르면서 그의 우상화 정책에 동참했다. '연안파', '소련파' 등은 어디까지나 출신지를 바탕으로 임의로 붙인 표현에 불과하고 이들은 실제 파벌이 아니며, 이미 학계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연안파, 소련파 표현을 쓰지 않고 쓰더라도 파벌이 아니라는 조심스러운 각주를 붙인다. 패전 후 김일성은 박헌영을 희생양으로 몰아 박살을 냈고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허가이도 숙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최창익, 박창옥, 박영빈 등 소위 김일성의 '정적'들이라던 인물들은 좋다고 팔 걷어 붙히고 참여하여 남로당파와 허가이를 쳐죽이고 그들이 가진 자리를 나눠가지면서 김일성의 오른팔 자리를 굳혔다. 최창익, 박창옥 등은 모두 김일성 우상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고 고려인 박창옥, 박영빈 등이 선전선동부장을 역임하면서 문예정책, 우상화 정책을 주도하였다. 전후 복구계획 과정에서 '연안파'와 '소련파'가 경공업 중시정책, 유연한 농업 정책을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 맞섰다는 학설이 유명한데, 이는 1970년대 오코노기 마사오가 제시한 학설이다. 과거 북한 자료가 없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받아들여진 주장이고 지금도 이렇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나, 나중에 소련 자료, 중국 자료들이 풀리면서 최창익, 박창옥 등이 오히려 김일성과 대단히 사이가 좋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특히 박창옥은 중공업 반대론자가 아니라 소련 측에 북한은 밥이 아니라 중공업이 필요하다고 바락바락 덤벼들 정도로 공업화를 지지한 인물이었다. 김일성은 박창옥을 제1부수상에 임명하는 것을 고려할 정도로 박창옥을 이뻐했고 이 때문에 박정애 등이 노골적으로 질투할 정도였다. 그런데 김일성이 무리하게 밀어붙힌 공업화 계획으로 인하여 1954~1955년 사이에 대기근이 발생하고, 경공업과 농업을 강조한 소련의 말렌코프 노선이 등장하면서 김일성에 대한 소련의 간섭이 강화되었다. 김일성은 박창옥과 김일에게 죄를 뒤집어씌웠고 날벼락을 맞은 고려인들은 중공업 정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김일성에게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이는 김일성을 몰아내고 자기들이 권력을 잡겠다는 발상이 아니라 김일성의 폭주를 막기 위한 억제장치를 도입하는 것 정도였으나, 김일성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피의 보복을 감행하였는데, 이때 김일성의 칼질에 대거 동참한 것이 다름 아니니 최창익, 윤공흠, 리필규, 서휘 등 연안계다. 이들은 대대적으로 고려인들을 두개의 의자에 앉은 이중국적자 찌끄러기들, 조선말도 모르는 오만한 대국주의자들로 몰아서 개박살을 내버렸다. 하지만 김일성은 고려인들을 몰락시키고 다시 연안계에 그 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박금철, 한상두, 박정애, 정일룡 등 자신을 추종하는, 경력에 결함이 있는 인물들을 대신 최고 지도부에 끌어들이고 연안계는 동지들을 핍박한 놈들이라고 역으로 토사구팽해버렸다. 한때 김일성의 부관으로까지 평가받았던 최창익은 정치위원회 석상에서 김일성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나서 쓸모 없는 인간으로 취급받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 앞서 고려인과 연안계들은 '아첨쟁이'들을 몰아내고 진짜 혁명가들인 자신들을 중용할 것을 김일성에게 요구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의 측근들의 잘못은 곧 자신의 잘못이라서 이들을 해임시키느니 차라리 자신이 사퇴한다고 배수진을 쳤다. 결국 3차 당대회는 완전히 김일성 최측근의 잔치판이 되었고, 소위 '8월 그룹'으로 불린 개혁파들은 정확히 자신들이 마르틴 니묄러의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음을 알고 거의 발악적인 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북한에서 매도한 것과 달리 쿠데타가 아니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한 합법적 반격이었고, 김일성을 숙청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빨치산으로 죽다 살아났던 김일성에겐 약간의 반발이라도 조금도 용서 없는 인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